(Google 번역 제공) 2021년 7월 12일(월)에 나호 미나토의 거리 산책으로 들렀다.
무성한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거의 원형대로 복원되어 나카미나토의 시가지 어디에서나 그 첨단을 볼 수 있는 구 나카미나토 시민의 상징과 같은 존재라고 느꼈다.
안내 간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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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키 현 지정 사적
나카미나토 반사로터 Nakaminato Cannon Foundry
에도 막부 말기, 나카 미나토 앞바다에도 이국선이 출몰하게 되어, 미토번 제9대 번주 도쿠가와 사이아키가, 해방의 요를 주창해 영내 각지에 포대를 구축하기 위해, 대포 주조를 목적으로 당 아즈마대에 건설했다 는 반사로(대형의 금속 용해로)이다.
건설에 있어서는, 사쓰마 번사 다케시타 직방, 미하루 번사 구마타 무네히로, 남부 번사 오오시마 고임들의 협력을 얻어, 나카미나토의 목수 히다 요시나와 기와 장인 후쿠이 센요시가 진력했다.
안정 2년(1855년)에 1호로(서쪽), 같은 4년에 2호
(동로)가 완성된 것. 높이 약 15m, 사용된 내화 벽돌은 약 4만장으로 알려져 있다.
겐지 원년(1864년)의 겐지 코코의 난으로 파괴되어 쇼와 12년에 현재의 모형이 거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지정일 헤세이 16년 11월 25일
설치자 히타치 나카시 교육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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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바라키현 교육위원회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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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번의 반사로는, 철제의 대포 주조를 목적으로, 안정년간에 2기 건조되었습니다. 건조되었다고 합니다. 64)의 번내 항쟁(元治甲子의 난 또는 텐구당의 난이라고 한다)의 때, 파괴되었습니다. 아즈마다이의 터에 거의 원형대로 복원되었습니다.
미토번은 도쿠가와 사이아키(1800~60)가 가영년에 이르고 번정에 관여할 수 있게 되면, 무기의 충실, 특히 종래의 동제로 바꾸어 철제 대포 주조의 필요성을 통감하도록 되고, 남부 번사의 오시마 고임(총좌위문)등을 반사로 건설의 기술자로서 채용했습니다. 하고는 아즈마다이가 선택되었습니다. 지반의 견고한 것, 미토성하 3리의 근교에서 경제적으로도 선박업으로 붐비는 번내 제일의 번영지인 것, 원료의 철과 연료의 석탄 의 조달 운반에 편리한 것, 콘 넣어 수차장의 건조에도 편의를 가지는 것 등의 조건을 만족하는 장소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야스마사 원년(1854) 8월, 기공식이 행해졌습니다. 얻기 위해 나스 군 고사 무라 (도치 기현 나카 군 나카가와 쵸)의 흙이 가장 적합합니다. 있는 것을 견해, 이에 이와키산의 연석(히부이시)의 분말을 일정한 비율로 혼합하는 것으로 열화에 견디는 벽돌의 소성에 성공했습니다. 계획했다고 합니다만, 당분간은 2기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다음 정 2년(1855) 1월부터 건조에 착수해, 11월에 1호로(서로)가 완성했습니다. 까지 건설하고 있습니다.완성한 대포는 약속에 의해 막부에 보내졌습니다. 1기에서는 한 번에 용해할 수 있는 철의 양은 약 400관이기 때문에, 2로 이상이 아니면 대형의 대포 주조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화회에 개량을 더해 같은 4년(1857) 12월에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몰틸포는 양질의 철을 얻을 수 없고 강도에 문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오오시마는 고향 남부의 가마이시(이와테현 가마이시시)에 출장해, 땅에 서양식 고로를 건설, 양질의 '유철'(철광석에서 정련된 선철) 공급에 전망을 두고 동 5 년(1858)년 1월, 나호 미나토로 돌아가, 주조의 본격적 조업을 개시했습니다.즉 2월부터는 2기의 반사로에서 모르틸포 3문, 카논포 1문을 주조, 한층 더 4월부터는 가마이시의 「유철」2700관이 나호 미나토에 도착해, 이것에 의해 3치수 직경 캐논포 3문을 주조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조 작업은 약 4년을 보내고 드디어 밝은 전망이 열렸습니다만, 전번 주사키가 다시 근신의 목숨을 받았다는 보도가 도착해, 이후 조업은 사실상 중지의 어려움에 이르렀습니다.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만연 원년(1860) 12월경으로 보여 , 겐지 원년(1864) 2월까지 카논 포수문의 주조가 행해졌지만, 같은 해 3월에 일어난 겐지 코코의 난의 영향은 나호 미나토에도, 10월에는 여기서 격전이 전개되어 이 때문에 반사로도 수차장도 그 전화 속에서 소실 붕괴했습니다.
나카 미나토 반사로의 완성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안정 2년(1855)이기 때문에, 연대적으로는 사가번, 사쓰마번, 막부의 이즈 니야마에 이어 전국 제4위라고 합니다. 허수아비에 의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고로의 건설은 미토 번의 주조 사업에 직결하는 것, 고심의 심지어 고도의 내화 벽돌 개발에 성공한 것은 일본 근대 제철 사상 및 세라믹 공업사상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입니다.또, 반사로가 건조된 장소에, 남겨져 있던 당시의 벽돌의 일부를 도입하면서 복원 모형을 세우고, 그 깔개 땅을 보존해 온 선인의 공적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원문)
2021年7月12日(月)に那珂湊の街歩きで立ち寄った。
緑豊かな公園の最も高台にほぼ原型通りに復元され、那珂湊の市街地のどこからでもその先端を見てとれる、旧那珂湊市民の象徴のような存在と感じた。
案内看板には以下のように記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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茨城県指定史跡
那珂湊反射炉跡 Nakaminato Cannon Foundry
幕末、那珂湊沖にも異国船が出没するようになり、水戸藩第9代藩主徳川斉昭が、 海防の要を唱えて領内各地に砲台を築くため、 大砲鋳造を目的として当吾妻台に建設したのが反射炉 (大型の金属溶解炉)である。
建設にあたっては、薩摩藩士竹下矩方、 三春藩士熊田宗弘、 南部藩士大島高任らの協力を得て、那珂湊の大工飛田与七や瓦職人福井仙吉が尽力した。
安政2年(1855年) に1号炉 (西)、 同4年に2号
(東炉) が完成した。 高さ約15m、 使用された耐火煉瓦は約4万枚といわれている。
元治元年(1864年) の元治甲子の乱で破壊され、 昭和12年に現在の模型が、ほぼ原型どおりに復元された。
指定日 平成16年11月25日
設置者 ひたちなか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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さらに茨城県教育委員会のホームページには以下のように記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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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戸藩の反射炉は、鉄製の大砲鋳造を目的として、安政年間に2基建造されました。反射炉とは、大型の金属溶解炉のことです。当時、全国に公営・民営あわせ十数箇所建造されたといわれています。しかし、元治元年(1864)の藩内抗争(元治甲子の乱又は天狗党の乱という)の際、破壊されました。やがて昭和8年(1933)頃から復元の動きが起こり、昭和12年(1937)12月、吾妻台の跡地にほぼ原形どおりに復元されました。
水戸藩は、徳川斉昭(1800~60)が嘉永年間に至って藩政への関与を許されるようになると、兵器の充実、とりわけ従来の銅製に変えて鉄製大砲鋳造の必要性を痛感するようになり、南部藩士の大島高任(総左衛門)らを反射炉建設の技術者として採用しました。建設地としては吾妻台が選ばれました。地盤の強固なこと、水戸城下3里の近郊で経済的にも廻船業で賑わう藩内随一の繁栄地であること、原料の鉄と燃料の石炭の調達運搬に便利であること、錐入れ水車場の建造にも便宜を有することなどの条件を満たす場所と判断されたためでしょう。
安政元年(1854)8月、起工式が行われました。大工棟梁となった飛田与七(宮大工)の指揮のもと、入念な基礎工事を施すとともに、耐火煉瓦の原料となる粘土を得るため、那須郡小砂村(栃木県那珂郡那珂川町)の土がもっとも適していることを見究め、これに磐城産の燧石(ひうちいし)の粉末を一定の割合で混ぜ合わせることで烈火に耐える煉瓦の焼成に成功しました。大島らは、当初10基の炉の建造を計画したといわれますが、当面は2基の完成を目指すこととし、翌安政2年(1855)1月から建造に着手し、11月に1号炉(西炉)が完成しました。同3年(1856)鋳込みをしてモルチール砲(臼砲)を1号砲から4号砲まで造っています。完成した大砲は約束により幕府へ送られました。もっとも、1基では一度に溶解できる鉄の量はおよそ400貫であるから、2炉以上なければ大型の大砲鋳造はできません。そこで、2号炉(東炉)の建造に着手し、1号炉と同型ながら火廻りに改良を加え、同4年(1857)12月に完成させました。
しかし、先のモルチール砲は、良質の鉄が得られず強度に問題を残しました。 そこで、大島は、故郷南部の釜石(岩手県釜石市)に出張し、かの地に洋式高炉を建設、良質の「柔鉄」(鉄鉱石から精錬した銑鉄)供給に見通しをつけて同5年(1858)年1月、那珂湊へ帰り、鋳造の本格的操業を開始しました。すなわち2月からは2基の反射炉でモルチール砲3門、カノン砲1門を鋳造、さらに4月からは釜石の「柔鉄」2700貫が那珂湊に到着し、これにより3寸径カノン砲3門を鋳造できました。
こうして鋳造作業は、約4年を費やしてようやく明るい展望が開けましたが、前藩主斉昭が再度謹慎の命を受けたとの報が届き、以後操業は事実上中止のやむなきに至りました。これが再開できたのは、万延元年(1860)12月頃とみられ、元治元年(1864)2月までカノン砲数門の鋳込みが行われたものの、同年3月に起こった元治甲子の乱の影響は那珂湊にも及び、10月にはここで激戦が展開されました。このため反射炉も水車場もその戦火のなかで焼失崩壊しました。
那珂湊反射炉の完成は、前述のように安政2年(1855)ですから、年代的には佐賀藩、薩摩藩、幕府の伊豆韮山に次いで全国第4位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大島によるわが国初の洋式高炉の建設は、水戸藩の鋳造事業に直結すること、苦心のすえ高度な耐火煉瓦の開発に成功したことは、わが国近代製鉄史上およびセラミックス工業史上に重要な意義をもつものです。また、反射炉が建造された場所に、残されていた当時の煉瓦の一部を取り入れながら復元模型を建て、その敷地を保存してきた先人の功績も忘れてはなりません。これらの点において、那珂湊反射炉は、本県の史跡の一つとして、その存在意義を十分に主張しうるも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