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 번역 제공) 모가미씨 사적, 게이쵸 데바 합전 사적.
2019년 7월 13일 방문.
하세도성은 모가미씨에게는 남쪽의 공격에 대해 야마가타를 지키는 중요한 거점이다.
1514년에 다테자네가 모가미 의정이나 텐도씨, 시미즈씨, 사가에씨 등의 연합군과 하세도성에서 싸워, 다테씨가 이것을 공격해 떨어뜨려, 소량천 친조를 두었다.
그 후 천문의 난으로 다테씨의 내교가 시작되면 모가미 요시모리가 하세도성을 되찾아 이후 모가미씨의 성이 되었다.
게이쵸 출우합전에 이르는 정세로서는 원래 모가미씨와 우에스기씨는 쇼나이 지방의 영유를 다투었던 인연이 있는 관계로, 결과 쇼우치는 우에스기씨의 영유가 되고 있었다. 나중에 사도에서 카모 씨 등 대신 아이즈, 치토모, 노부오, 다테 등으로 이봉되어 모가미 씨는 우에스기 씨의 쇼나이의 날아와 이봉처의 아이즈 등의 소령과 끼워지는 위치 관계에 놓여져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1600년 6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을 위해 출진해, 따르는 동군 제장을 오야마에 모으지만, 7월 24일,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을 알고, 유우키 히데야스 등을 억제해 남기고, 동군 제장을 선발대로서 상방으로 향하게 해,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에서 동군에의 끌어당기기 공작 등으로 대기했다.
한편 모가미 요시미츠를 주장으로, 우에스기 씨를 요네자와구치에서 공격하는 것에 대비하여 최상령 내에 전개하고 있던 아키타 씨, 토자와 씨, 로쿠고 씨 등의 오우바군은, 이에야스로부터 시모치가 없기 때문에, 자령 당겨 올라 다테씨에 이르러서는 우에스기씨와 화목을 맺어 버린다 그리고 9월 1일, 기후성 낙성의 소식을 받은 이에야스가 에도에서 출발, 별동대의 도쿠가와 히데타다도 우에다 방면에 출발했다.
이에야스에 대비하고 있던 우에스기군은, 전면의 적이 부재해, 우에스기씨와 적대하는 배후의 모가미씨를 표적으로 하고 있지만, 오슈 제장이 인양해, 북방의 서군 오노데라씨에게도 대비해야 하는 최상 씨는 120만석의 우에스기 씨에게 단독으로 상대를 하게 되어 궁지에 빠졌다.
9월 8일, 우에스기군은 나오에 카네츠구를 주장으로 요네자와, 쇼우치에서 최상령 내에 총 25000명의 병사로 침공.
모가미 요시미츠는 병력 집중 때문에 각 성으로 철퇴하여 야마가타성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하타야성의 에구치 미츠요시는 이를 무시하고 500명의 병사로 옥쇄해 우에스기군에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 우에야마성의 사토미 민부도 마찬가지로 500의 병사 밖에 없었지만, 성에서 치고 나와, 쿠사카리 시마와 함께 우에스기군을 협격해, 우에스기군에 큰 손해를 입히고, 동방면의 우에스기군의 하세 도성의 나오에 본대에의 합류를 막았다.
이렇게 선전한 모가미군이었지만, 우에스기군의 물량에 밀려 각 속성을 떨어뜨려 점차 쫓아가고, 모가미가와 서안에 남아 있는 모가미씨의 거점은 하세도성만이 되었다.
성장의 시무라 미츠야스와 연어 히데츠나 등 불과 1000명 정도로 지키는 최상세에 대해,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끄는 우에스기세 1만8000명이, 하세도성의 북방 1킬로 정도의 위치에 있는 스가사와야마에 진 을 치고 공성전에 대비했다.
하세도성을 떨어뜨리면, 뒤가 없는 모가미 요시미츠는, 9월 15일, 적남 모가미 요시야스를 해 다테 마사무네에게 원군의 의뢰에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날, 나오에 카네츠구는 하세도성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성장의 시무라 미츠야스가 잘 수비해, 16일 밤에는 야습을 걸어, 우에스기군에 손해를 주고, 한층 더 17일, 공격해 온 카스가 모토 충률 있는 부대가 후카다에 발을 잡히고 있는 곳을 습격해 격퇴, 21일에는 다테 마사 종으로부터 파견된 유수 정경이 이끄는 3000명이 도착, 전황은 잠시 교착하지만 29일 우에스기군이 하세도성에 재공격을 가하면 시무라 광안이 이끄는 최상세는 우에스기군 장, 카미이즈미 태강을 토벌하는 전과를 꼽았다.
그리고 같은 날, 상방에서의 서군의 패보가 우에스기군에 도착해, 다음날에는 최상군에게도 그 정보가 알려지면, 10월 1일, 우에스기군이 철퇴를 개시, 모가미씨, 다테씨는 추격을 시작했다.
철퇴전은, 추격하는 모가미 요시미츠의 투구에 총탄이 맞을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 되지만, 우에스기군은, 나오에 카네츠구 스스로 전군이 되고, 또 마에다 이익이나 수원 친헌의 기능도 있어, 추격을 뿌리치는 일 수 있었다.
한편, 모가미군은 우에스기군에 점령된 속성을 회복하고, 골목성에 맡겨진 수장시타 히데히사를 항복시켜, 동인의 선도에 의해 쇼나이를 점령했다.
이들의 전공이 평가되어 모가미씨는 쇼나이 지방 및 사타케씨와의 영토교환에 의해 수카츠군, 히라카군으로 바꾸어 유리군을 주어져 57만석의 대번이 되었다.
하세도성은 표고야말로 227미터이지만, 실제의 비고는 85미터이며, 성의 규모로서는 그다지 크지 않고, 기슭에서 15분이나 걸으면 본곽에 도착해 버리지만, 최고부에 주 윤곽이 그 아래에 여러 곡이 있습니다. 겹치도록 마련된 구조는 견고한 것 같다. 성의 주위는 후카다에서 남쪽에서 서쪽에 걸쳐 혼자와 강이 천연의 해자가 되고, 한층 더 혼자와 강에서 물을 당긴 해자로 성의 구획을 둘러싸고 주곽은 넓고, 나오에 카네츠구의 진적도 일망할 수 있다.
토호쿠의 세키가하라라고 불리는 이 장소에서의 합전은 우에스기군을 도호쿠에 못 박아 이에야스의 천하취를 용이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모가미씨는 33만석이라는 파격의 가증을 받았다.
그러나 모가미씨도 3대로 개역되었고, 그에 따라 하세도성도 폐성이 되었다.
한여름에 방문한 하세도성은, 바로 「츠와모도가 꿈의 흔적」이라고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원문)
最上氏史跡、慶長出羽合戦史跡。
2019年7月13日来訪。
長谷堂城は最上氏にとっては、南からの攻めに対し、山形を守る重要な拠点である。
1514年に、伊達稙宗が、最上義定や天童氏、清水氏、寒河江氏等の連合軍と長谷堂城で戦い、伊達氏がこれを攻め落とし、小梁川親朝を置いた。
その後天文の乱で伊達氏の内訌が始まると、最上義守が長谷堂城を取り戻し、以後最上氏の城となった。
慶長出羽合戦に至る情勢としては、元々は最上氏と上杉氏は、庄内地方の領有を争った因縁のある関係で、結果庄内は上杉氏の領有となっていた。また、上杉氏が越後、佐渡から蒲生氏等の代わりに会津、置賜、信夫、伊達等に移封され、最上氏は、上杉氏の庄内の飛び地と移封先の会津等の所領と挟まれる位置関係に置かれた。
豊臣秀吉の死後、1600年6月、徳川家康は会津征伐の為に出陣し、従う東軍諸将を小山に集めるが、7月24日、石田光成の挙兵を知り、結城秀康等を抑えとして残し、東軍諸将を先発隊として上方に向かわせ、家康自身は江戸で東軍への引き留め工作等で待機した。
一方最上義光を主将として、上杉氏を米沢口から攻めいる事に備え最上領内に展開していた秋田氏、戸沢氏、六郷氏等の奥羽諸軍は、家康から下知が無い為、自領に引き上げ、伊達氏に至っては上杉氏と和睦を結んでしまう。そして9月1日、岐阜城落城の知らせを受けた家康が江戸から出発、別動隊の徳川秀忠も上田方面に出発した。
家康に備えていた上杉軍は、前面の敵が不在となり、上杉氏と敵対する背後の最上氏を標的として定めるが、奥州諸将が引き揚げ、北方の西軍小野寺氏にも備えなければいけない最上氏は、120万石の上杉氏に単独で相手をする事となり、窮地に陥った。
9月8日、上杉軍は直江兼続を主将として、米沢、庄内から最上領内に総勢25000人の兵で侵攻。一方の最上氏の総兵力は7000人でしかなかった。
最上義光は兵力集中の為、各城に撤退して山形城に集結する指示を出したが、畑谷城の江口光清はこれを無視、500人の兵で玉砕し、上杉軍に1000人の死傷者を出させた。
また、上山城の里見民部も同様に500の兵しかいなかったが、城から打って出て、草刈志摩と共に上杉軍を挟撃し、上杉軍に大損害を負わせ、同方面の上杉軍の長谷堂城の直江本隊への合流を阻んだ。
こうして善戦した最上軍であったが、上杉軍の物量に押されて各属城を落とされて次第に追い詰められ、最上川西岸に残る最上氏の拠点は長谷堂城のみとなった。
城将の志村光安と鮭延秀綱等僅か1000名程で守る最上勢に対し、直江兼続が率いる上杉勢1万8000名が、長谷堂城の北方1キロ程の位置にある菅沢山に陣を張り、攻城戦に備えた。
長谷堂城を落とされると、後が無い最上義光は、9月15日、嫡男最上義康をして伊達政宗に援軍の依頼に向かわせた。そして同日、直江兼続は長谷堂城に対し、攻撃を開始した。
しかし城将の志村光安がよく守備し、16日夜には夜襲をしかけ、上杉軍に損害を与え、さらに17日、攻め寄せた春日元忠率いる部隊が深田に足を取られているところを襲撃し撃退、21日には伊達政宗から派遣された留守政景率いる3000名が到着、戦況は暫時膠着するが29日に上杉軍が長谷堂城に再攻撃をしかけると、志村光安率いる最上勢は、上杉軍の将、上泉泰綱を討ち取る戦果を挙げた。
そして同日、上方での西軍の敗報が上杉軍に届き、翌日には最上軍にもその情報が知れ渡ると、10月1日、上杉軍が撤退を開始、最上氏、伊達氏は追撃を開始した。
撤退戦は、追撃する最上義光の兜に銃弾が当たる程、熾烈な戦いとなるが、上杉軍は、直江兼続自ら殿軍となり、また前田利益や水原親憲の働きもあって、追撃を振り切る事ができた。
一方で、最上軍は上杉軍に占領された属城を回復し、谷地城に取り残された守将下秀久を降伏させ、同人の先導により庄内を占領した。
これらの戦功が評価され、最上氏は庄内地方及び佐竹氏との領土交換により雄勝郡、平鹿郡に替えて由利郡を与えられ、57万石の大藩となった。
長谷堂城は標高こそ227メートルあるが、実際の比高は85メートルであり、城の規模としてはそれほど大きくなく、ふもとから15分も歩けば本郭に辿り着いてしまうが、最高部に主郭が、さらにその下に幾重もの郭が重なるように設けられている造りは、堅固そうである。城の周囲は深田で、南から西にかけ本沢川が天然の堀となり、さらに本沢川から水を引いた堀で城の区画を取り囲んでいる。主郭は広く、直江兼続の陣跡も一望できる。
東北の関ケ原と言われる、この場所での合戦は、上杉軍を東北に釘付けにして、家康の天下取りを容易にしたと言われ、最上氏は33万石という破格の加増を受けた。
しかし最上氏も三代で改易され、それに伴い長谷堂城も廃城となった。
真夏に訪ねた長谷堂城は、まさに「つわものどもが夢の跡」といった感じでした。